오늘은 프랑스의 걸작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오귀스트 로댕의 조수이자 뮤즈였지만, 그 자체로도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였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삶은 슬픔과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감동을 주고 있는데요. 그럼,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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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 끌로델의 어린 시절과 조기 교육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 Villeneuve-sur-Fèr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Camille-Rosalie Claudel, 까미유-로살리 끌로델이었습니다. 까미유는 가톨릭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첫째였는데, 그녀의 집안은 사회적 지위가 꽤 높은 편이었습니다. 까미유의 남동생 폴 클로델은 그녀가 4살 때 태어났습니다. 폴 클로델은 나중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어렸을 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골의 자연 풍경을 좋아했고,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12살 때부터 점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림과 조각에 대한 책을 읽고,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도나텔로와 첼리니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1881년, 까미유 끌로델은 파리로 이주하여 현재 그랑 쇼미에르(Grande Chaumière)로 불리는 콜라로시 아카데미(Colarossi Academy)에 등록했습니다. Colarossi는 당시 여학생을 받아들이던, 얼마 되지 않는 예술 기관 중 하나였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미술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동료 여성 조각가들과 함께 1882년 스튜디오 공간을 빌려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로댕의 조수이자 뮤즈였던 까미유 끌로델
까미유 끌로델의 첫 번째 멘토는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라는 조각가였습니다. 부셰는 까미유 끌로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순수한 멘토와 멘티의 관계였지만, 부셰는 까미유 끌로델에게 존경과 숭배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1882년에 까미유 끌로델 리상(Camille Claudel lisant)이라는 제목으로 된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셰는 그랑프리 듀 살롱(Grand Prix du Salon)에서 우승한 후 아쉽게도 까미유 끌로델을 떠나 이탈리아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부셰는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으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을 추천했습니다. 로뎅은 당시 이미 호평을 받는 조각가였으며, 까미유 끌로델은 곧 그의 최고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두 조각가 사이의 관계는 순수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과 열정을 느꼈고, 함께 작업하고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로 까미유 끌로델은 가족에게 우려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지만, 그 외 가족은 그녀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결국 까미유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가장 신뢰받는 조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The Kiss (1882) 및 The Gates of Hell (1880-1890)을 포함하여 로댕의 가장 유명한 조각품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그녀를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천재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애 관계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로댕은 이미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자와 오랜 기간 동안 사귀고 있었고, 로댕은 뵈레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까미유는 로댕과 뵈레의 관계에 대해 질투를 하며 괴로워했고, 이 감정은 곧 편집증과 분노로 발전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이 그녀의 작품을 훔치고, 수입을 갈취하고, 그녀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조각가로서의 삶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조수로 지내는 동안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로댕의 미술 스타일에 큰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표현과 주제를 찾으려고 했고,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개성과 감정을 반영했습니다.
1886년, 까미유 끌로델은 샤쿤탈라(Sakuntala)라는 조각품으로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작품은 인도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두 연인이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비평가들은 작품의 감성과 인간의 모습에 대한 심리적 영향을 칭찬했습니다.
로댕과 이별 후 까미유 끌로델은 더 이상 로댕의 작업실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때부터 끌로델의 새 작품은 더 작아지고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표현되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 끌로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배신감을 느꼈고 로댕의 도움을 거부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과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최고의 작품을 창작하고 수행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새 작품은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르누보와 일본 판화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The Waltz (1889-1905), The Mature Age (1898-1913), The Wave (1898) 등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사랑과 고통, 희망과 절망, 자유와 갇힘을 표현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말기
1899년부터 까미유 끌로델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혼자 살면서 일을 했으며,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로댕은 1904년 경 까미유 끌로델에게 집세를 지불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부터 까미유 끌로델은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은둔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까미유 끌로델은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작업실에 있던 작품 대부분을 파괴했습니다. 1913년에는 항상 딸의 선택을 지지해 주던 까미유 끌로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까미유 끌로델을 무기한 입원시켜 버렸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안타깝게도 정신병원에서 30년을 보냈고, 친했던 남동생 폴의 방문도, 오랜 친구들의 방문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은 79세가 되던 해에 그렇게 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은 오늘날 여러 박물관과 전시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다음의 링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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