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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 뜻, 고려시대 고위 관직 중 하나

by 알아봐요 2023. 12. 23.

고려시대에는 여러 가지 관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급이었던 것이 바로 문하시중이었습니다. 문하시중이란 중서문하성이라는 부서의 장관으로, 정부의 중요한 사무를 총괄하고 왕에게 보고하고 의논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문하시중은 고려시대의 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하시중이라는 직함은 고려시대 내내 변화가 많았습니다. 원나라의 침략과 영향으로 중서문하성이 다른 부서와 합쳐지거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고, 정원도 좌우로 나뉘거나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하시중은 종친이나 원로 재상에게 주는 영예직이나 은퇴직이기도 했기 때문에, 항상 충원되지 않고 결원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문하시중이라는 관직의 정의와 개설, 그리고 내용과 변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문하시중은 고려시대의 역사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현재의 관직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문하시중 뜻

문하시중이란 고려시대의 종1품(第一品)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수상직(首相職)이었습니다. 종1품이란 고려시대의 관직 등급을 나타내는 체계로, 1품이 가장 높고 18품이 가장 낮았습니다. 중서문하성은 고려시대의 정부 기구 중 하나로, 왕의 명령을 받아 정부의 사무를 총괄하고, 왕과 재상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법령이나 영장 등을 작성하고, 왕의 칙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수상직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직으로, 중서문하성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의논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이므로, 고려시대의 최고관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하시중은 왕의 신임을 받아 정부의 사무를 주도하고, 왕과 재상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왕의 칙령을 전달하는 등 권력과 영향력이 매우 큰 직책이었습니다. 문하시중은 고려시대의 수상이라고도 불리며, 현재의 국무총리나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문하시중의 개설

문하시중이라는 직함은 고려시대 초반에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려의 성종이 즉위한 982년(성종 1) 이전에는 내의성(內議省)이라는 부서가 있었는데, 이 부서는 왕의 명령을 받아 정부의 사무를 총괄하고, 왕과 재상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법령이나 영장 등을 작성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내의성의 장관은 내의시중(內議侍中)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내의성의 권력이 너무 커서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내의성을 폐지하고, 그 역할을 중서성(中書省)과 문하성(門下省)이라는 두 개의 부서로 나누었습니다. 중서성은 왕의 칙령을 작성하고, 문하성은 왕의 칙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중서성과 문하성은 각각 중서령(中書令)과 문하령(門下令)이라는 장관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부서도 성종의 뜻대로 잘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중서성과 문하성은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면서 정부의 사무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중서성과 문하성을 다시 합쳐서 중서문하성이라는 하나의 부서로 만들었습니다. 중서문하성은 내의성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면서도 왕권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부서로 운영되었습니다. 중서문하성의 장관은 중서문하시중(中書門下侍中)이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고려의 문종이 즉위한 1031년(문종 1)에 중서문하시중이라는 직함이 간소화되어 문하시중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문종은 문하시중을 종1품, 정원 1인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문하시중이라는 관직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습니다.

 

문하시중의 변천

문하시중이라는 관직은 고려시대 내내 변화가 많았습니다. 원나라의 침략과 영향으로 중서문하성이 다른 부서와 합쳐지거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고, 정원도 좌우로 나뉘거나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하시중은 종친이나 원로 재상에게 주는 영예직이나 은퇴직이기도 했기 때문에, 항상 충원되지 않고 결원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하시중의 변천은 다음과 같습니다.

  • 1275년(충렬왕 1) : 원나라의 강요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尙書省)이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로 되면서 문하시중은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원도 좌·우 각 1인으로 늘어났습니다.
  • 1298년 : 충선왕이 즉위해 문하시중은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쳐 부른 적이 있으나, 같은 해 충선왕이 퇴위함과 동시에 중찬으로 복구되었습니다.
  • 1308년 : 충선왕이 복위해 문하시중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바꾸고, 정원도 1인으로 줄였습니다.
  • 1330년(충숙왕 17) : 충혜왕이 즉위해 문하시중은 다시 중찬으로 복구하였으나, 얼마 뒤 정승으로 고치면서 정원을 좌·우 각 1인으로 늘렸습니다.
  • 1354년(공민왕 3) : 문하시중은 도첨의시중으로 바뀌었다가 곧 도첨의정승으로 되었습니다.
  • 1356년 : 반원운동(反元運動)의 일환으로 문종 때의 관제가 복구되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고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 상우(尙右)의 원칙에 따라 차관직인 좌정승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되었습니다.
  • 1362년 : 도첨의부가 다시 두어지면서 문하시중은 첨의정승으로 되었다가 이듬해 첨의시중으로 고쳐졌습니다.
  • 1369년 : 도첨의부가 문하부(門下府)로 개편되면서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습니다. 이때 정원은 좌·우 각 1인이던 것이 창왕 때 상좌(尙左)의 원칙에 따라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으로 각각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문하시중은 고려시대 내내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문하시중 뜻, 고려시대 고위 관직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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