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

십자군 전쟁 이야기, 시작, 결과, 살라딘, 영화

by 알아봐요 2023. 9. 10.

십자군 전쟁 이야기, 시작, 결과, 살라딘, 영화

십자군전쟁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중해 동부와 중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종교적 군사적 충돌입니다. 이 전쟁은 서유럽의 기독교 왕국들과 이슬람 세계의 셀주크 투르크, 아이유비, 마므룩 왕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군전쟁의 주요 목적은 예루살렘과 성지를 이슬람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군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십자군전쟁 역사 요약

십자군전쟁은 여러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 첫 번째 십자군전쟁 :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움
  • 두 번째 십자군전쟁 : 에다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잃음
  • 세 번째 십자군전쟁 : 하띠틴 전투에서 패배하고 예루살렘을 잃음
  • 네 번째 십자군전쟁 : 본래 목적인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세움
  • 다섯 번째 십자군전쟁 : 다미에타를 포위하고 점령했으나 곧 잃음
  • 여섯 번째 십자군전쟁 : 마므룩 왕조와 협상하여 예루살렘의 일부를 되찾음
  • 일곱 번째 십자군전쟁 :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됨
  • 여덟 번째 십자군전쟁 : 튀니지를 공격하였으나 역병에 걸리고 실패함
  • 아홉 번째 십자군전쟁 : 시리아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바리 왕조의 반격 및 몽골의 후퇴로 성과 없이 종료

 

십자군전쟁?

십자군전쟁이란 중세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벌인 종교전쟁입니다. 십자군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십자군전쟁 시작 및 원인

십자군전쟁은 아래와 같은 원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약화와 튀르크족의 성장 : 11세기에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성지를 침략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서유럽의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했습니다.
  • 교황의 권력과 영향력 확장 :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요청을 계기로 기독교 세계를 통합하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십자군을 소집했습니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죄사함과 천국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 서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 : 서유럽은 봉건제도와 인구증가로 인해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였습니다. 십자군에 참여하면서 영광과 명예, 부와 영토를 얻기를 바랐습니다.

 

 

십자군전쟁 과정 이야기

제1차 십자군(1096~1099)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선포한 후, 수만 명의 기사와 민중이 지중해 동해안으로 출발했습니다. 민중 십자군은 중간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해산되었고, 기사 십자군은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제2차 십자군(1147~1149)

예루살렘 왕국이 에데사 백국을 잃고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와 독일의 왕들이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이슬람 세력에 패배하면서 실패하였습니다.

 

제3차 십자군(1189~1192)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이번 십자군은 아크레와 야파를 점령하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었으나, 예루살렘은 되찾지 못했습니다.

 

제4차 십자군(1202~1204)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베네치아의 해상교통을 이용하기로 한 십자군은 돈이 부족하여 베네치아의 요구에 따라 자신들의 목적과는 무관한 장소들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약탈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을 붕괴시켰습니다.

 

제5차 십자군(1217~1221)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선포한 이번 십자군은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는 세력이 강한 아이유비 왕조가 세워져 있었고, 십자군은 닐강 삼각주에서 패배하고 철수하였습니다.

 

제6차 십자군(1228~1229)

홀리로만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이번 십자군은 전쟁이 아니라 협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았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살라딘의 후계자인 알 카밀과 친분이 있었고, 그와의 협정으로 예루살렘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협정은 다른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들에게 반대를 받았습니다.

 

제7차 십자군(1248~1254)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끈 이번 십자군은 다시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바리 왕조가 세워져 있었고, 십자군은 다미엣타와 만수라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루이 9세는 큰 몸값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제8차 십자군(1270)

루이 9세가 다시 이끈 이번 십자군은 튀니스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튀니스는 바리 왕조와 동맹이었고, 십자군은 열병과 기근에 시달리다가 루이 9세가 사망하면서 해산되었습니다.

 

제9차 십자군(1271~1272)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이끈 이번 십자군은 시리아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 왕조의 반격과 몽골의 후퇴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십자군전쟁 결과

십자군전쟁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 교황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습니다. 교황은 십자군을 소집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으며,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수여했습니다.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었고,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 왕권과 중앙집권이 강화되었습니다. 십자군에 참여한 성주들이 많은 재산과 병력을 잃었으며, 일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은 성주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 봉건제가 약화되었습니다. 십자군에 참여한 노예들은 자유를 얻거나, 새로운 땅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십자군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농업 생산력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노예들의 수요와 가치를 높이고, 봉건적 의무를 완화시켰습니다.
  • 상업과 교역이 번창했습니다. 십자군은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십자군은 중동에서 새로운 물품과 기술을 접하고, 유럽으로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비단, 향료, 종이, 나침반, 화약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물품들은 유럽의 상인들에게 큰 수익을 가져다주었으며, 해양 공화국들이 부상했습니다.
  • 문화와 종교가 다양화되었습니다. 십자군은 유럽과 중동 사이에 문화적 교류를 촉진했습니다. 십자군은 중동의 예술, 건축, 문학, 철학 등을 배우고, 유럽으로 전파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밤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고딕 양식 등이 있습니다. 또한 십자군은 유럽 내부에서도 다른 문화와 종교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회, 유대교, 이단 등이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성을 증진시켰습니다.

 

 

십자군전쟁과 살라딘

십자군전쟁의 전쟁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살라딘이었습니다. 살라딘은 12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었으며, 이슬람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군과 맞서 성지를 탈환하고,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을 보여준 인물로 유명합니다.

 

살라딘은 1137년 또는 1138년에 이라크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삼촌인 시르쿠의 부하로서 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1169년에는 이집트의 장관이 되었으며,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니파 교단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등을 지배하였습니다.

 

1174년에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시리아의 술탄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군과 여러 번 전투를 벌였으며, 대부분 승리하였습니다. 단 한 번,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특히 샤티용의 레날드를 원수로 삼았습니다.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하고,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습니다.

 

1187년 7월 4일에는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연합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살라딘은 레날드를 사로잡아 처형하였으나, 뤼지냥의 기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어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였습니다.

 

1189년부터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아크르를 공격하였으나, 살라딘은 저항하였습니다. 결국 1191년에 아크르가 함락되었으나, 십자군은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지 못하였습니다. 1192년에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은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십자군은 해안가의 몇몇 도시들을 소유하고,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영웅으로, 기독교 세계에서는 존경받는 상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인격과 행위는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십자군전쟁 관련 영화

십자군 전쟁에 관한 영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

2005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2세기에 벌어진 제3차 십자군전쟁을 배경으로, 프랑스의 대장장이인 발리안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사가 되고 이슬람의 영웅인 살라딘과 대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십자군전쟁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살라딘과 같은 이슬람 캐릭터들도 인간적이고 존중받을 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발리안이 만난 여왕 시벨라는 실제로는 발리안보다 나이가 어리고, 살라딘과 결혼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발리안이 예루살렘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드라마틱한 픽션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하였고, 오를란도 블룸, 에바 그린, 리암 니슨 등이 출연하였습니다.

 

아이언클래드

이 영화는 13세기에 벌어진 제4차 십자군전쟁을 배경으로, 잉글랜드의 왕좌를 탐내는 왕자 존과 그에 반대하는 기사들의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십자군전쟁의 잔혹하고 혼란스러운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투 장면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강렬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도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주인공인 템플러 기사 토마스는 존과 싸우다가 죽게 되는데, 실제로는 그가 존과 싸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인 아이젤라도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액션과 스릴러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며

십자군전쟁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문화적 교류와 영향력을 증대시켜주었으나, 동시에 많은 인명과 재산을 희생시키고 종교적 갈등과 적대감을 야기시켜주었다. 십자군전쟁은 중세 유럽의 역사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