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는 누구일까?
강조는 고려 전기에 활동한 권신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벼슬을 지냈고,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고려의 국가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거란의 포로가 되어도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강조의 생애와 활동사항
강조는 목종 때 중추사우상시로서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습니다. 1009년에 김치양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에 거짓 소식을 듣고 다시 본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때 강조의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 속에 서신을 넣어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강조는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와 김응인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 왕순(훗날의 현종)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인을 귀양 보냈습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냈는데 그 도중에 상약직장 김광보를 시켜 살해함으로써 대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강조는 새로운 국가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은대와 중추 남북원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을 설치해 세 관청의 기무를 모두 이곳에 소속시켰습니다. 이러한 인사조처는 국왕 측근직의 단일화를 꾀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군사권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권력집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1009년 3월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에까지 오름으로써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강조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강조는 행영도통사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까지 내려와 물을 사이에 두고 세 곳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거란군이 중앙을 찌르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번번이 승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인 검차를 만들어 거란군을 대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승리에 자만하여 거란군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경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 이현운, 도관원외랑 노전, 감찰어사 노의, 양경, 이성좌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때 거란의 성종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권유하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해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면에 이현운이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뜻을 굽히자 발길로 걷어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라면서 최후를 마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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