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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관청, 객성의 역사와 기능

by 알아봐요 2024. 2. 11.

오늘은 고려 초기의 관청인 객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객성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담당하던 곳이었는데요, 어떻게 설치되고 발전했는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객성에 속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객성은 한자로는 '客省'이라고 씁니다.

 

객성의 설치와 변천

객성은 고려 태조 4년(921년)에 예빈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예빈성은 고려의 왕실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의 사신(使臣)이나 특별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예우와 복지를 제공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예빈성은 성종 14년(995년)에 객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요, 이는 고려가 외교적으로 강력해져서, 외국의 사신들을 빈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객성은 예빈성보다 더 권한이 강화되었고, 외국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데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객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곧 다시 예빈성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객성과 예빈성은 번갈아가면서 사용되었는데요, 이는 고려의 외교 정책과 외국의 사신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객성의 역할과 기능

객성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담당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객성은 외교 문서나 선물을 관리하고, 외국의 사신들과의 회담이나 연회를 준비하고, 외국의 문화나 풍습을 연구하고, 외국의 정세나 소식을 수집하고, 외교 정책이나 교섭을 제안하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들을 선발하고 훈련하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객성은 고려의 외교 활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고려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객성은 고려의 외교 체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객성의 구성과 인물

객성은 여러 개의 부서로 구성되었습니다. 객성의 최고 책임자는 객부(客部)라고 불렸고, 그 아래에는 객사(客司), 객감(客監), 객부사(客副司), 객부감(客副監) 등이 있었습니다. 객성의 직원들은 대부분 문관(文官)이었고, 외교에 관심이 있거나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객성에는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려의 문학과 예술을 발전시킨 김부식(金富軾), 고려의 법제와 행정을 개혁한 정몽주(鄭夢周), 고려의 국력과 안보를 강화한 이승기(李承伎), 고려의 불교와 성리학을 융화시킨 이규보(李奎報) 등이 있습니다. 객성은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빛나는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었습니다.

 

마치며

객성은 고려 초기의 관청으로,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객성은 고려의 외교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고려의 외교 체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한 만큼 객성은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데 흥미로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 관청, 객성의 역사와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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