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창이란 누구일까요? 고려 전기에 발해의 유민으로서 요나라에서 발해광복운동을 벌인 인물입니다. 그는 발해가 붕괴된 후에 요나라의 관직을 받고 친거란화되었지만,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일으킨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활동사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영창의 출생과 성장
고영창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발해가 붕괴된 후에 동단국의 요양에 강제 이주된 발해유민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는 요나라의 교육을 받고 공봉관이라는 관직에 올랐습니다. 공봉관은 요나라의 황제에게 직접 부쳐서 공무를 보는 신분이었습니다. 고영창은 이런 신분으로 요나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잊지 않았습니다.
고영창의 발해광복운동
고영창은 1115년에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동으로 남하하는 기세를 보았습니다. 요나라는 고영창에게 발해무용마군이라는 군대를 모집하게 하고 백초곡이라는 곳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때 고영창은 요나라의 재상 장림과 소한가노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던 발해유민들을 선동하여 요양부를 점령하고, 국호를 대발해국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 삼아졌고,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요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고영창의 패배와 죽음
고영창은 발해광복운동을 일으킨 후에 요동부의 50여 개주를 지배하며 강력한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금나라와 교섭을 시도했지만, 황제의 칭호를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금나라와 요나라의 양면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5월 말에 금나라의 여진군에 의해 요양부가 함락되고, 수산에서 크게 패하자 기병 5천을 이끌고 장송도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금나라 군사에게 잡혀 참살되었습니다. 그의 발해광복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영창의 평가
고영창은 발해의 유민으로서 요나라의 관직을 받고 친거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잊지 않고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발해의 자주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의 발해광복운동은 짧았지만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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