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려 후기에 활약한 한 무신과 내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고종수라는 분입니다. 고종수는 왕경등처관군만호부만호, 삼주호부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고종수의 출생과 성장
고종수는 태어난 연도나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리를 잘 불었고, 이를 통해 충렬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충렬왕은 피리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고, 고종수를 자주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종수는 왕의 피리꾼으로서 내료의 지위를 얻었고, 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고종수의 벼슬과 권세
고종수는 내료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권세도 부렸습니다. 1282년에는 왕의 청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무략장군순마천호의 벼슬을 받았고, 1293년에는 다시 왕경등처관군만호부만호에 임명되고 삼주호부도 하사받았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드물게 무신과 내료의 벼슬을 동시에 겸한 경우였습니다. 고종수는 왕의 귀족으로서 왕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외적과의 전쟁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고종수의 폐단과 공로
고종수는 왕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리다 보니, 일부 폐단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염승익, 윤수, 이정 등의 내관과 더불어 전장을 많이 설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경작시키고, 또 근처의 민전으로부터도 조세를 받아들여 국가재정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고려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수는 완전히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인후가 군사들로 하여금 백성의 말을 빼앗게 하자 이를 금지시켰으며, 또 감찰시사 허유전이 왕이 총애하는 후궁의 참소로 순마소에 감금되자 이를 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고종수가 왕의 신임을 받아 권세를 행사하면서도, 일부 정의와 인도심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고종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고종수는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묘소도 어디에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고려 후기의 한 무신과 내료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리다가도, 일부 폐단을 끼치기도 하고, 일부 공로를 세우기도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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