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태후의 탄생과 혼인
공예태후는 정안 임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날 즈음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궁궐에서 노니는 귀인이 될 것이라는 현몽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18세에 경주 김씨와 결혼하기로 되었는데, 혼인날 당일 갑자기 병이 나서 결혼을 못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점을 치니, 무당은 그녀가 귀히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그녀의 아버지를 개성부사로 강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종의 왕비들이 폐출되었고, 인종은 그녀를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그녀는 연덕궁주라고 불렸고, 의종, 명종, 신종 등 3명의 왕과 4명의 궁주를 낳았습니다. 인종은 그녀의 고향인 장흥부를 지장흥부사로 승격시켰습니다.
공예태후의 삼남과의 관계
공예태후는 처음에 의종의 자질을 의심하고 둘째인 대녕후를 총애하여 그를 태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의종과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왕태후로 존칭했지만, 대녕후 경이 모반사건에 연루되자 그녀는 대녕후 경을 보호하기 위해 의종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의종은 오히려 지난날의 섭섭함을 표출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버선발로 궁전에서 내려가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맹세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쳐 의종은 자기 잘못을 뉘우쳤다고 합니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던 때 그녀는 유종을 앓고 있었고, 명종은 그녀의 동생인 충희를 불러 간병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충희가 죽었을 때 그녀에게 늦게 알리자 그녀는 충희가 무신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생각하고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신종이 평량공으로 있을 때에 그도 치질을 앓아서 오랫동안 그녀에게 문안하지 못하자 공예태후는 평량공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종이 그녀를 문안하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병이 진행되어 향년 75세로 사망했습니다. 공예태후는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에 있는 순릉에 안장되었습니다. 시호는 공예태후라고 하였습니다. 공예태후의 이름을 딴 공예태후문화제가 매년 열립니다.
공예태후의 평가와 유산
공예태후는 고려시대의 왕비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많은 자손을 낳았습니다. 공예태후는 꿈과 현실, 사랑과 증오, 충성과 배신이 얽힌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왕비로서의 의무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잘 조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고려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기도 한 만큼 공예태후는 고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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