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구주대첩은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고려와 거란의 강동육주를 둘러싼 오랜 갈등의 정점이었으며, 고려의 상원수 강감찬이 거란의 총지휘관 소배압을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20만8천의 고려군으로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글에서는 구주대첩의 배경, 경과, 결과,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구주대첩 배경
구주대첩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와 거란의 강동육주에 대한 갈등을 알아야 합니다. 강동육주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을 말하는데, 이 지역은 고려가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외교적 수완으로 점유를 인정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거란은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보고 계속해서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는 강동육주를 공격적으로 개척하고 방어하기 위해 강감찬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을 파견하였습니다. 1010년(헌종 1) 거란의 제2차 침입 때에는 흥화진의 수장 양규가 거란 성종이 거느린 40만 대군을 구주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대파하였습니다. 이처럼 강동육주의 성진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1018년 12월 제3차 침입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때 거란군의 총지휘관은 소배압이었으며, 10만의 군사를 거느렸습니다. 고려는 이에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기로 하였습니다.
구주대첩 경과
거란군은 1019년 1월 초에 고려의 서북면을 침략하였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삼교천에서 맞서 싸웠으나, 거란군의 강한 화력과 기동력에 밀려 물러나야 했습니다. 거란군은 이어서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흥화진에서의 패배로 거란군은 전의를 잃고 남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거란군을 뒤쫓아가며 계속해서 공격하였습니다. 자주(평안남도 자산) 남쪽에서는 강민첨이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큰 희생을 주었고, 서경(평안북도 신의)의 동북 마탄에서는 거란군이 대동강을 건너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여 많은 익사자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불운이 겹쳐 거란군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의 신은현에서 회군하여 연주(평안남도 개천)와 위주(평안북도 영변) 사이에서 청천강을 건너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거란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다시 구주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에 몰려 북으로 달아나는 거란군을 뒤쫓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구주의 전면을 흐르는 석천을 지나 반령까지 강감찬의 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습니다.
구주대첩 결과
구주대첩은 고려의 엄청난 승리로 끝났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10만 중 9만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거란군의 최고 명문인 요련장의 상온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 해리(海里) 등과 같은 고위간부들이 전사하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이 패전에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고려의 현종은 이 승리에 크게 기뻐하였으며, 강감찬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국민들에게도 공무를 면제시켰습니다.
구주대첩의 의의
구주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육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강동육주의 안정과 발전을 이루었으며, 거란과의 관계도 상대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구주대첩은 고려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 그리고 장수들의 뛰어난 지도력과 전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강감찬은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시기에 공격하고, 끈질기게 추격하면서 거란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강감찬은 이 전투를 통해 고려의 최고의 장수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업적은 『강감찬가』라는 노래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주대첩은 또한 우리나라 전쟁사상에서도 흔치 않은 대승리였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10배에 달하는 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거란군의 전체 군사력의 1/4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고려의 국위를 높이고, 국민들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고취시켰습니다. 구주대첩은 고려의 국가방위와 국가통일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요약
구주대첩은 고려와 거란의 강동육주를 둘러싼 갈등의 정점이었으며, 고려의 상원수 강감찬이 거란의 총지휘관 소배압을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20만8천의 고려군으로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의 엄청난 승리로 끝났으며, 거란의 정벌욕을 완전히 꺾고, 강동육주의 안정과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구주대첩은 고려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평가받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쟁사상에서도 흔치 않은 대승리였습니다. 구주대첩은 고려의 국가방위와 국가통일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와 조선 초기 지방제도, 계수관 알아보기 (1) | 2023.12.19 |
---|---|
고려시대 서리직, 계사의 역할과 대우는? (0) | 2023.12.19 |
만적의 난 이란? (萬積의 亂) 노비 반란의 배경과 의의 (1) | 2023.12.17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 및 주요 작품 (1) | 2023.12.17 |
전세계에서 구사자가 가장 빠르게 늘고있는 언어 Top 5 (1) | 2023.1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