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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 초기 지방제도, 계수관 알아보기

by 알아봐요 2023. 12. 19.

계수관이란 무엇일까요? 고려와 조선 초기에 있었던 지방제도의 한 형태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대읍 혹은 그 곳의 수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계수관은 중앙과 지방의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였습니다. 오늘은 계수관의 정의, 개설, 내용, 변천과 현황, 의의와 평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계수관의 정의

계수관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지방의 행정구획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을 가리켰습니다. 고려에서의 경(京)·목(牧)·도호부(都護府), 조선 초기의 부(府)·목·도호부가 이에 해당했습니다. 그 수는 시대에 따라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등 일정하지 않았으나, 대체로 고려 전기 14개소, 후기 34개소, 그리고 조선 태종 2년 25개소, 세종 때 38개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경우 때로는 계수관에 영속된 영군(領郡)·영현(領縣)·속군·속현을 제외한 경·부·목·도호부 그 자체만을 계수관이라고 했던 사례도 나타났습니다.

 

다른 하나로, 계수관은 군현을 거느리는 대읍의 수령(守令)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즉, 고려시대에는 3경의 유수·8목의 목사·4도호부의 도호부사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부윤·목사·대도호부사·도호부사가 계수관이었습니다. 이처럼 계수관은 행정구획과 수령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 점에 대해서는 최근 다른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즉, 고려 군현제는 진·현령관급(鎭縣令官級) 이상의 관부와 속군현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는 이중구조인데, 군현지배의 본질적인 부분이 조세와 역역(力役) 수취라는 데 주목하여 진·현령관급 이상의 관부가 모두 계수관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계수관의 의미를 확대 적용한 것입니다.

 

계수관의 개설

계수관은 고려가 지방호족세력들과 연합정권적 성격을 띤 왕조였기 때문에 이후의 집권과정을 통해서도 중앙정부·도·주·현이라는 행정체제를 수립하지 못한 채, 전국 각 지역의 세력가인 호족을 통해 지방백성을 지배, 통치하는 방식을 병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앙에서 지방의 주·현에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외관을 파견해 대읍의 세력가(호족)들을 지배하고, 주·현 가운데 그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외관이 파견된 곳)으로 하여금 주위의 소읍을 통할(모두 거느려 다스림)하는 간접지배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고려왕조는 이 체제로 중앙집권을 추구하였지만 중앙에서 모든 군현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고려시기에는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보완장치가 필요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계수관과 안찰사였습니다.

 

고려왕조는 현종대를 전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경·목·도호부 등 대읍을 계수관으로 삼아 지방지배의 중심으로 활용하였으며, 이어서 5도를 설치하고 도에 정기적으로 안찰사를 파견하여 수령을 감찰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때에 따라 다양한 임시 사행을 파견하여 지방지배를 관철하였습니다. 결국, 고려는 중앙의 관할 하에 교통로나 대읍을 중심으로 형성된 몇 개의 큰 단위를 통해 다스린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계수관 중심의 체제였습니다.

 

계수관의 역할

계수관은 계(界) 내의 순찰관(巡察官)·행정관(行政官)·군정관(軍政官)의 직임을 지닌 대읍의 수령이었습니다. 또한 계수관은 고려시기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많은 인구와 넓은 토지, 많은 관원과 시설을 가진 대읍으로서 그 지역의 교통, 경제활동, 교육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계수관의 기능을 살펴보면, 영역의 대표로서 팔관회 등 국가의 주요 행사에 표를 올려 축하하거나 왕을 대신하여 제사 등의 행사를 개최하는 일, 왕이 그 영역에 행차하면 그 영역의 대표로서 영역 안에 들어온 왕을 알현하거나 왕의 행차를 대접하였으며, 공문서의 발송이나 방물(方物: 관찰사나 수령이 임금에게 바치던 그 고장의 특산물)을 중앙에 납부하는 일, 영역 안에 들어온 외국사신을 관리를 파견하여 마중을 하거나 접대하는 일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외관의 상급체계로서는 관내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향공(鄕貢: 고려시대에 과거의 삼공의 하나. 지방에서 실시한 제1차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이른다)선상(選上: 골라 뽑아서 바침)의 임무, 지방 범죄자의 추문(推問: 죄상을 추궁하여 심문함), 말〔斗〕이나 되〔升〕 등 도량형(度量衡: 길이, 부피, 무게 따위의 단위를 재는 법)을 통일시키는 임무, 농사를 장려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왕의 탄신기념일인 성평절(成平節 : 고려 문종 때에 임금의 탄신일을 기념하던 날)을 맞이할 때 가까운 사찰을 찾아가서 왕의 만수무강을 부처님께 기원하였고, 또한, 상번(上番: 번이 갈리어 근무 교대를 하러 들어가는 사람)하는 군사들의 장비를 점검하였으며, 소·돼지 등 가축사육에 관해서도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계수관의 변천과 현황

고려 시대에는 계수관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고려 초에는 14개였는데, 고려 후기에는 34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가 지방의 세력가들과 함께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중앙이 지방을 잘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앙은 계수관을 통해 지방을 간접적으로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도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이 생겼습니다. 도는 계수관보다 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관청이었습니다. 도가 생기면서, 계수관은 중요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계수관이 더 없어졌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아직 통치체제가 완성되지 않아서, 계수관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세조 때에는 군읍이라는 더 작은 행정구역이 생겼습니다. 군읍은 계수관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어서, 지방을 잘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수관은 필요없어졌고 군익 체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계수관의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이, 고려와 조선 초기에 걸쳐 존재했던 계수관제는 실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 하에서 기능했던 시대적 산물로서, 15세기 들어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그 의의를 잃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고려와 조선 초기의 지배형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는 제도라 하겠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 지방제도, 계수관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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