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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의 난 이란? (萬積의 亂) 노비 반란의 배경과 의의

by 알아봐요 2023. 12. 17.

고려시대에 노비들이 일으킨 역사상 가장 큰 반란 중 하나인 만적의 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반란은 1198년에 개경(지금의 서울)에서 발생했으며,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위해 투쟁한 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만적의 난 이란? (萬積의 亂) 노비 반란의 배경과 의의

 

만적의 난 배경

고려사회는 왕과 귀족들이 지배하는 신분사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노비는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었으며,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노비들은 주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팔리거나 죽일 수 있었고, 고된 노동과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부터는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무신들이 노비들을 자신들의 군대나 관리로 삼아주면서 노비들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들은 노비들을 자신들의 측근으로 삼아주고, 신분을 해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무신란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무신란은 1170년에 무신들이 왕권을 약화시키고 집권한 사건입니다. 이때 무신들은 천민 출신의 인물들을 관직에 임명하거나 승진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최충헌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무신들의 지원을 받아 관직에 오르고, 결국에는 집권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신집권기에는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약화되었고, 천민들은 자신들도 신분을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무신들은 천민들을 과세하고, 노예로 팔거나 빼앗기도 했습니다. 또한 무신들은 천민들을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켜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민들은 무신들에게 저항하고, 신분해방을 위해 봉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란의 전개

1198년 5월,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던 사동(私僮) 만적과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 6명의 노비들이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이들은 공노(公奴)와 사노(私奴)들을 불러모아 선동했습니다. 이들은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갑인일(5월 9일)에 흥국사에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환관(宦官)과 궁노(宮奴)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이고, 각자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사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4일 후에 다시 보제사에서 모여 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주인에게 반란 계획을 고발했습니다. 이로써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00여 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적의 난 의의와 평가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천민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해 무신들에게 도전한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소임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반란 이후에도 천민들의 반란은 계속되었습니다. 1200년에는 진주에서 공노와 사노들이 반란을 일으켜 합주의 민란에 가세했습니다. 또한 밀성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의 민란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반란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천민의 투쟁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도의 붕괴와 농민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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