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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과 흥화진 전투

by 알아봐요 2023. 11. 27.

귀주 대첩과 흥화진 전투

 

 

고려와 거란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전투는 1019년에 흥화진과 귀주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장수 강감찬은 거란군을 크게 물리치고 고려의 독립과 안전을 지켰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강감찬이 어떻게 거란군을 물리쳤는지, 그리고 그 전투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을 물리치다

귀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과 맞서 싸운 이 사람은 바로 강감찬입니다. 강감찬은 고려의 명장으로, 고려의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강감찬은 어떤 전술로 거란과 맞서 싸웠을까요? 강감찬은 적의 특성과 지형을 잘 파악하고, 기습과 포위, 협공과 분할 등 다양한 작전을 구사했습니다. 특히 귀주에서는 넓은 들판에서 기병전을 펼쳐 거란군의 장점을 상쇄시켰습니다.

 

2. 거란이 고려를 넘보다

거란은 고려와의 1차 전쟁을 협상으로 마무리한 후에 송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 끝에 거란은 승리하고, 송은 해마다 거란에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송에게 승리한 거란은 이제 고려를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거란은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추대한 것을 구실로 두 번째로 고려를 침입했습니다(1010년, 현종 1). 하지만 2차 전쟁은 두 나라 모두 큰 피해만 입고 별 소득 없이 끝났습니다.

 

이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고려 현종은 직접 거란 황제를 찾아뵙는다(친조)는 거짓 약속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거란이 약속한 친조를 요구하자 현종은 병을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강동 6주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거란은 현종이 친조를 거부하자 강동 6주를 다시 가져가겠다고 일방적으로 알려왔습니다. 물론 고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1018년 고려는 거란의 세 번째 침입을 받았습니다.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앞세운 10만의 거란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소배압은 처음부터 고려의 성을 하나씩 점령하기 보다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단숨에 점령하여 전쟁을 단숨에 끝내버리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습니다.

 

3. 흥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강감찬은 군사들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했습니다. 흥화진은 개경으로 가기 위해 거란군이 꼭 지나쳐야 할 곳이었습니다. 강감찬은 흥화진 옆 하천에 이르러 기병 1만 여 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큰 줄로 쇠가죽을 꿰어 묶어 성 동쪽의 큰 개천을 막고 거란군을 기다렸습니다.

 

거란군이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자 막고 있던 쇠가죽을 끊어 물줄기를 터뜨렸습니다. 갑작스런 물줄기에 놀라 우왕좌왕하던 거란군을 미리 숨어 있던 고려의 기병들이 기습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함락하기 힘든 흥화진을 우회하여 가려던 거란군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준비한 고려군의 승리였습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진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감찬은 거란군의 속셈을 알아채고 군대를 나누어 일부는 거란군을 추격하게 하고, 일부는 따로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추격하던 고려군은 만 여 명의 거란군의 목을 베기도 했습니다.

 

거란군이 개경 인근에 도달했을 때 개경은 이미 빈틈없는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거란군은 기습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마저 고려군에 들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거란군은 거듭된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의욕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결국 소배압은 더 이상 공격할 자신이 없어 개경 포기하고 군사를 되돌렸습니다.

 

4.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철수하던 거란군은 귀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귀주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만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방어하기가 쉬운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강감찬은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하지 않고 들판에 군사를 배치했습니다. 강감찬은 귀주 동쪽으로 퇴각하는 길목을 막고 소배압의 거란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자 했습니다. 또 앞서 개경으로 보낸 군대로 거란군의 뒤를 쫓게 해 협공을 준비하였습니다.

 

두 나라 군사들은 모두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승패가 쉽사리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려의 지원군 1만 명이 추가로 도착했습니다. 전세는 고려에 결정적으로 유리해졌습니다.

 

때마침 갑자기 북쪽의 거란군 쪽을 향해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거세 바람을 타고 고려군의 화살들이 거란군 진영으로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반대로 거란군의 화살은 멀리 날아가지 못했습니다. 하늘마저 고려를 돕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매섭게 공격하였고, 거란군은 크게 패하여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달아나는 거란군을 악착같이 쫓아가 공격하였습니다. 패한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으며 사로잡힌 병사와 획득한 말과 낙타·갑옷·무기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또한 10만 명의 거란 군사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거란의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이렇게 강감찬이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 크게 승리하였다고 하여 이 전투를 ‘귀주 대첩’이라고 불러요.

 

5. 귀주 대첩의 의미와 영향

귀주 대첩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거란은 그동안 끈질기게 요구했던 친조를 더 이상 강요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압록강 연안의 성을 둘러싸는 두 나라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전쟁의 결과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는 실마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주로 산성에 의지해 지키면서 지쳐있는 적을 공격하는 작전을 많이 펼쳤습니다. 그런데 강감찬은 귀주에서 뜻밖의 작전을 구사했습니다. 기병을 동원하여 넓은 벌판에서 거란 기병과 맞서 싸웠습니다. 강감찬은 왜 이전과는 다른 작전을 펼친 것일까요? 넓은 벌판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말을 몰아 외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됩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특성과 장단점을 잘 파악했습니다. 거란군은 기병전에 능하고, 속도와 기동성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정된 전술을 따르고, 지형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강감찬은 이를 이용하여 거란군을 유인하고, 기습하고, 포위하고, 분할하고, 협공하는 방식으로 공격했습니다. 또한 강감찬은 고려군의 기병을 훈련시켜 거란군의 기병과 견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장점을 상쇄시키고, 고려군의 장점을 살리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넓은 벌판에서 기병전을 펼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거란군의 기병은 산악 지형에서는 활약하기 어려웠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기병을 산골짜기에서 끌어내려 평지에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 거란군은 귀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평지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진로를 미리 예측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하지 않고, 들판에서 공격하였습니다.
  • 거란군은 개경에서 패배한 후 귀주로 철수하면서 사기가 저하되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사기가 낮은 상태에서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고자 했습니다.
  • 고려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사기가 상승하였습니다. 강감찬은 고려군의 사기가 높은 상태에서 최대한 많은 승리를 거두고자 했습니다.
  • 고려군은 귀주에서 지원군을 받았습니다. 강감찬은 고려군의 인원이 많은 상태에서 최대한 많은 전력을 발휘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강감찬은 귀주에서 넓은 벌판에서 기병전을 펼쳐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고려의 군사력과 강감찬의 지략을 보여주는 전투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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