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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사란? 고려시대 정무기관 도평의사사의 역사와 역할

by 알아봐요 2024. 1. 30.

고려 시대에는 국가의 최고 정무기관으로 도평의사사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도평의사사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오늘은 도평의사사의 역사와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도평의사사의 역사

도평의사사는 고려 전기에는 도병마사라고 불리었고, 도당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병마사는 중앙의 두 대 궁궐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에서 선정한 고위 관리들이 모여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하던 임시 회의기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 중기부터는 국방과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생과 복지에 관한 문제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종 말년에는 도당이라고 부르고, 재추라는 중앙의 최고 관리들이 모두 참석하여 국정의 모든 사안을 의논하고 결정하였습니다.

 

1279년에는 도평의사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구성과 기능이 더욱 확대되고 강화되었습니다. 도평의사사에는 재추뿐만 아니라 삼사라는 세 가지 관청의 요원들도 포함되었고, 정식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지만 국정에 참여하는 상의라는 인물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고려 말에는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이 70~80명에 달했습니다.

 

도평의사사는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계속 존재했습니다. 1392년에는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를 바탕으로 새롭게 개편되었습니다. 그러나 1400년에는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다음 해에는 태종이 문하부라는 관청을 통합하여 백규서무라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도평의사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도평의사사의 역할

도평의사사는 기능면에서도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임시로 모여 국정을 논의하던 기관이었지만, 나중에는 상설적으로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국가의 서무를 직접 시행하는 행정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 후기에는 도평의사사가 중앙의 여러 관청을 총괄하고, 지방의 감찰관인 제도안렴사에게 공문을 보내고, 왕의 명령까지도 도평의사사를 통해 시행하였습니다. 도평의사사는 고려의 중앙 통치기구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도평의사사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실무원들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에 걸쳐 행정기관을 새로 만들거나 확대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 말 공양왕 때에는 도평의사사의 상부에는 문하부, 삼사, 밀직이라는 세 가지 관청의 정원들로만 구성된 판사, 동판사, 사라는 회의기구가 있었습니다.

 

도평의사사의 하부에는 경력사라는 실무기구가 있었습니다. 경력사에는 3, 4품의 경력과 5, 6품의 도사라는 두 명의 관리가 있었고, 그들은 6방녹사라는 여섯 개의 부서와 전리라는 사무원들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렇게 도평의사사는 행정기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상으로 도평의사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도평의사사란? 고려시대 정무기관 도평의사사의 역사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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