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무신집정자 최우(崔瑀)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가 된 만종(萬宗)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사(禪師)의 승계를 받았지만, 승려로서의 품위와 도리를 버리고 재물과 권세에 눈이 먼 무뢰승(無賴僧)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만전(萬全)과 함께 문도(門徒)들을 이끌고 지방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그의 횡포는 몽골의 침략과 최씨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나, 결국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만종의 삶과 행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만종의 출생과 승려가 된 이유
만종은 고려 후기의 무신집정자 최우의 서자(庶子)로 태어났습니다. 최우는 고려 고종(高宗)의 시조(侍從)로서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다가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최우는 병권(兵權)을 사위인 김약선(金若先)에게 맡기려 했으나, 두 아들이 반발할까 두려워 모두 송광사(松廣寺)로 보내 승려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만종은 선사의 승계가 제수된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종은 승려로서의 수행과 가르침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재물과 권세를 탐했습니다.
만종의 횡포와 문도들
만종은 단속사(斷俗寺)에 거주하면서 동생 만전과 함께 무뢰승들을 모아 문도로 삼았습니다. 문도들은 이름난 절에 분거(分居)해 관인(官人)이라 사칭하면서 지방관을 능멸하고 인민(人民)을 침탈하는 등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려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습니다. 특히 경상주도(慶尙州道)에서는 쌀 50여만 석을 민가에 꾸어주고 이식(利息)을 취해, 가을에 곡식이 익자마자 가혹하게 징수해 백성들은 가진 것을 만종의 문도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조세마저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1240년(고종 27) 안찰사 왕해(王瑎)가 조세 납입 전에는 사채를 독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만종 형제의 횡포를 저지하였습니다.
만종의 위기와 최우의 보호
만종의 횡포는 남쪽 지방민들이 소요(騷擾)해 몽골병이 내침했을 때 반역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낳았습니다. 1247년에는 형부상서 박훤(朴暄)과 경상주도순문사 송국첨(宋國瞻)이 만종 형제를 소환하고 그 문도들을 처벌해 민심을 위무하자고 최우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최우는 어사(御史) 오찬(吳贊)과 행수(行首) 주영규(朱永珪)를 단속사 등지로 파견해 만종 등이 쌓아둔 전곡(錢穀)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문권(文券)을 불살랐으며, 문도 중에서 못된 짓을 하는 자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만종이 만전과 함께 최우에게 하소연하자 최우는 오히려 부자 사이를 이간했다며 박훤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하고 송국첨을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좌천시켰습니다. 이렇게 최우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고 그의 횡포를 묵인하였습니다.
만종의 몰락과 최씨정권의 붕괴
만종은 최우의 보호를 받아 그의 횡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258년에 최우의 장남 최의(崔竩)가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최씨정권이 몰락하였습니다. 이에 만종은 그동안 쌓아둔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만종은 고려시대의 무뢰승으로서 역사에 남았으나, 그의 삶은 승려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잃은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만종에 대한 평가
만종은 고려시대의 무뢰승으로서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는 승려로서의 품위와 도리를 버리고 재물과 권세에 눈이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만전과 함께 문도들을 이끌고 지방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그의 횡포는 몽골의 침략과 최씨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나 결국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사라졌습니다. 만종의 삶은 어떻게 보면 승려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잃은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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