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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慶儀) - 고려 후기의 문신

by 알아봐요 2023. 12. 28.

오늘은 고려 후기에 활약한 문신, 공신인 경의(慶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경의는 밀직부사, 계림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다가, 태조 즉위 이후에 문하평리, 참찬문하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의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경의는 누구?

경의는 고려 후기에, 밀직부사, 계림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다가, 태조 즉위 이후에 문하평리, 참찬문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공신입니다. 그는 고려의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경의의 본관은 청주(淸州)입니다. 그는 경대승(慶大升)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시중 경복흥(慶復興)이고, 아들은 경습(慶習)입니다. 그는 고려의 문벌 중 하나인 청주 경씨의 일원으로,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문관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경의의 생애 및 활동사항

경의는 1377년(우왕 3) 4월 밀직부사로서 서경도순문사 겸 서북면부원수(西京都巡問使兼西北面副元帥)가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북면의 군사를 통솔하였습니다. 1379년 4월 동지밀직으로 양광경상전라조전원수가 되어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다음 달 진주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왜구의 성을 공략하고, 적을 쫓아내는 등 공을 세웠습니다.

 

1388년 4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 휘하에서 계림원수(鷄林元帥)로서 요동정벌에 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위화도회군의 일원으로서 명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려고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회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성계의 집권과정에서 일시 소외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4월 전원주등처병마절제사(前原州等處兵馬節制使)로서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에 녹훈되었습니다. 이는 이성계가 자신의 반역을 용서받기 위해 공양왕에게 경의 등의 공신들을 추천한 것입니다.

 

1392년(태조 1) 6월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남경(南京)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습니다. 이는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고 태조라는 즉위명을 받은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1393년 7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회군2등공신(回軍二等功臣)에 녹훈되고, 같은 해 12월 하정사로서 요동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해에도 요동에서 명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요동의 영토를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 외직으로 나아가 서북면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로 평양윤(平壤尹)을 겸하였습니다. 이는 태조가 경의의 공을 인정하고, 그를 중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잘 다스리고, 왜구의 침입을 막는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시호는 순절(順節)이고, 묘소는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에 있습니다.

 

결론

경의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공신으로서, 왜구와 명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건국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이성계의 반역과 집권에도 불구하고, 충성과 의리를 지키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공과 업적은 우리 역사에 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의(慶儀) - 고려 후기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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