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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전이란? 고려시대 공음전의 역사와 의미 살펴보기

by 알아봐요 2023. 12. 27.

고려시대에는 토지가 국가의 소유였고, 관리들에게 임시로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음전은 특별한 토지로서,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영구적으로 지급되었고, 그들의 자손에게도 상속될 수 있었습니다. 공음전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공음전의 기원과 지급규정

공음전은 1049년에 문종이 개국공신과 향의귀순성주에게 지급한 훈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훈전은 국가의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하는 특별상여제였습니다. 훈전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지급되었고, 1097년에는 공음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만 지급되었고, 그들의 품위에 따라 토지와 장작의 양이 정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1품은 문하시랑평장사 이상에게 전 25결 시 15결, 2품은 참지정사 이상에게 전 22결 시 12결을 각각 지급하였습니다. 산관이나 원리에게는 공음전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공음전의 특징과 의미

공음전은 국가 분급지였지만, 개인 소유지와 다름없었습니다. 공음전은 세습이 허용되었고, 매매와 처분도 자유로웠습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의 공음전은 사위나 조카, 양자나 의자 등에게도 상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단, 모반이나 대역 등의 중대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공음전을 박탈당했습니다. 공음전은 양반전시와는 달리 그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양반층의 형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공음전은 고위 관료들의 권력과 부를 확보하고, 그들의 충성심과 헌신심을 보답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공음전의 폐단과 개혁

그러나 공음전은 고려시대의 토지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공음전은 국가의 토지를 개인의 토지로 전환시켰고, 토지의 불균등한 분배를 초래했습니다. 공음전은 고위 관료들의 특권이었기 때문에, 저품위의 관리나 민간인들은 토지를 얻기 어려웠습니다. 공음전은 또한 토지의 과다분양과 토지의 농사능력 저하를 가져왔습니다. 공음전은 장작을 함께 지급받았기 때문에, 산림의 파괴와 환경의 훼손을 야기했습니다. 이러한 공음전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여러 왕들이 공음전의 회수나 감액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공음전은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의 한 특색이었지만, 그 동시에 그 시대의 문제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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