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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의 생애와 업적, 영향력 살펴보기

by 알아봐요 2023. 12. 26.

장경왕후의 생애와 업적, 영향력 살펴보기

 


장경왕후 생애

장경왕후는 고려 제18대 의종의 왕비입니다. 성은 김씨이지만, 누구의 성을 따라 김씨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이고, 어머니는 신씨입니다.

 

강릉공은 고려 제11대 문종의 손자이며, 제15대 숙종과는 이모형제입니다. 따라서 장경왕후와 의종은 재종숙질관계입니다. 고려 왕실에서 남매간 혼인사례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경우는 근친혼의 성격이 어느 정도 지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릉공의 세 자매는 모두 인종의 세 왕자들과 혼인하여, 한명은 의종비가 되고 한명은 명종비가 되었으며, 나머지 한명은 신종비가 되었습니다. 또, 아들인 공화후 왕영은 인종의 딸인 승경궁주와 혼인하였습니다.

 

이처럼 왕실의 왕자 및 공주와 사중(四重)의 중복혼인을 하였던 점으로 보아, 장경왕후의 집안은 왕실 내에서도 상당히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경왕후는 의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배필로 삼았습니다. 의종은 숙종의 증손이기 때문에 장경왕후와의 관계는 재종숙질관계입니다. 고려 왕실에서 남매간 혼인사례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경우는 근친혼의 성격이 어느 정도 지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위 후에 흥덕궁주로 봉하였습니다. 장경왕후는 의종과 사이에서 효령태자와 경덕, 안정, 화순의 세 공주를 낳았습니다.

 

효령태자는 1153년(의종 7)에 왕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난 뒤 진도현에 유배되었습니다. 장경왕후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의종의 후궁인 숙비 최씨와 함께 정중부의 난을 피해 탈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장경왕후는 1182년(의종 16)에 4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습니다. 시호는 장경(莊敬)이고, 1253년(고종 40)에 혜자(惠資)의 시호를 더하였습니다.

 

장경왕후의 업적 및 영향력

장경왕후는 의종의 왕비로써 내조에 힘썼으며,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 많은 불사(佛事)를 행하였습니다. 1156년에는 효령태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금은자(金銀字)로 화엄경 4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고려 왕실에서 화엄경을 금은자로 만든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1165년에는 흥덕사(興德寺)를 중창하고, 1170년에는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하였습니다. 이처럼 장경왕후는 불교를 통한 문화적 발전에 기여한 왕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장경왕후는 고려 왕실 내에서도 상당히 유력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그녀의 세 자매가 모두 인종의 세 왕자들과 혼인하여, 한명은 의종비가 되고 한명은 명종비가 되었으며, 나머지 한명은 신종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인 공화후 왕영은 인종의 딸인 승경궁주와 혼인하였으며, 그녀의 친정인 강릉공의 집안은 고려 왕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장경왕후의 삶을 통해 본 고려 왕실의 혼인 관습

장경왕후의 삶을 통해 고려 왕실의 혼인 관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장경왕후의 친정인 강릉공의 세 자매는 모두 인종의 세 왕자들과 혼인하여, 한 명은 의종비가 되고 한 명은 명종비가 되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신종비가 되었습니다. 또, 아들인 공화후 왕영은 인종의 딸인 승경궁주와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혼인 관습은 고려 왕실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려 왕실은 유교적 전통을 따르기는 했지만, 중국의 유교 국가에 비해 왕권이 비교적 강력했습니다. 왕실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고, 그 중 하나가 근친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려 왕실에서도 근친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근친혼은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고려 왕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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