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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

각염법 뜻, 각염법의 내용과 문제점, 폐지 과정 살펴보기

by 알아봐요 2024. 1. 5.

각염법이란 고려시대에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각염법은 충선왕 때부터 실시되었으며, 국가재정의 확보와 권세가의 억압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염법은 여러 가지 문제점과 폐단을 야기하였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염법이 폐지되고 소금의 징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각염법의 시행 배경, 내용, 문제점, 폐지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각염법의 시행 배경

각염법이 처음 출현한 시기는 기록의 결핍으로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충선왕 때부터 실시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충선왕 이전에는 소금 생산자인 염호(鹽戶)로부터 매년 일정액의 염세만을 징수하는 징세제가 행해졌는데, 충선왕 때에 와서 당시의 급박한 재정난의 해결과 몽고와의 관계 이후 새로이 등장한 권세가의 억압을 위해 각염법의 시행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각염법의 시행은 12~13세기에 이루어진 소금생산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특히 12세기 이후 증대되고 있던 유민(流民)은 소금생산의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또한 대몽항쟁을 전후해 해도(海島)를 중심으로 한 연해지방에는 농토로부터 이탈된 농민들과 피난민들에 의해 새로운 소금산지가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각염법의 내용

국가는 각염법의 시행으로 전국의 모든 염분(鹽盆)을 국가에 소속시키고 군현민을 징발해 염호를 삼았으며, 민부(民部)로 하여금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소금의 생산은 국가가 염호에게 일정한 자립성을 부여해 생산과정을 맡기고, 지정한 공염액(貢鹽額)을 납입시켰습니다. 생산에 필요한 도구와 경비는 염호가 모두 부담하였습니다. 한편, 유통부문에서는 국가가 염호가 속해 있는 연해 군현의 염창(鹽倉)에 공염을 수집해, 일부는 당해 군현민에게 판매하고, 나머지는 소금이 생산되지 않는 경중(京中)과 내륙 군현으로 옮겨 판매하였습니다. 그 값은 2석(石)에 포(布) 1필, 4석에 은 1냥으로서, 소금의 전매로부터 얻어진 세입은 포 4만 필이었습니다. 판매방식은 연해군현과 내륙군현, 그리고 경중의 지역에 따라 각기 달랐는데, 어느 경우에나 국가에서 직접 판매를 담당하는 관매법(官賣法)으로서 민간상인의 개업을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각염법의 문제점

이처럼 각염법은 생산부문에서 소금 공급의 부족과, 유통부문에서 관염관(管鹽官)들의 부정, 그리고 사염(私鹽)의 성행 등 여러가지 폐단이 노출되어 정상적인 시행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철저한 전매제의 시행을 뒷받침할 만큼 국가통제력이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행 뒤 얼마되지 않아 권호(權豪)들에 의한 염분의 탈점현상이 나타나면서 소금의 공급이 더욱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금의 구매대가로 납부하던 염가포(鹽價布)가 새로운 조세항목으로 변화되어 백성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각염법은 소금의 전매를 통한 국가재원의 확보보다 그와는 무관한 염세라는 명목의 새로운 세원(稅源)의 신설을 통한 재정확보를 꾀함으로써 각염법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각염법의 폐지 과정

각염법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재정확보라는 국가재정의 측면에서는 일정한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각염법이라는 명목 자체는 폐지되지 않고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 명목만 남은 각염법은 폐지되고 다시 징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의창(義倉)의 재원확보를 위해 각염법을 시행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후로도 각염법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각염법은 고려시대의 소금정책의 한 형태로서, 국가재정과 권세가의 억압을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과 폐단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조선시대에 들어 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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