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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

군현제 -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서 근대까지의 변천사 쉽게 보기

by 알아봐요 2023. 12. 15.

군현제 -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서 근대까지의 변천사 쉽게 보기

 

군현제 뜻

군현제란 전국을 몇 개의 행정구획으로 나누고 여기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 제도입니다. 한국의 군현제는 중국의 것을 도입한 것이나 실제 운용 측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전근대사회는 국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관료제에 입각한 집권체제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국가의 명령을 지방에 전하고 민으로부터 각종 세역을 수취하여 물적인 토대를 구축할 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토대를 실현하는 매개체가 바로 군현제입니다.

 

 

신라시대의 군현제

신라라는 국가가 커지면서 더 많은 땅을 잘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방법을 군현제라고 합니다. 신라는 주변에 작은 나라들을 자기 밑에 두고, 그 나라들에게 세금이나 일꾼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나라들은 신라의 규칙을 따라야 했습니다.

 

철로 된 농기구를 쓰고 물을 잘 끌어오면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는 것이 나뉘었습니다. 신라는 작은 마을들을 촌이라고 부르고, 자기 나라의 일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주, 군, 촌이라는 세 가지 단위로 땅을 나누었습니다. 주, 군 촌에는 신라 사람들이 보내져서 관리를 했습니다.

 

신라가 더 오래되면서, 주, 군, 촌과 소경이라는 작은 도시들이 땅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주의 중심지나 군대가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적으로 땅을 나눈 단위였습니다. 전자는 군주라는 사람이, 후자는 주행사대등이라는 사람이 책임지었습니다. 신라의 주는 땅을 다스리는 것보다 군대를 두는 것이 더 중요했고, 싸움으로 땅이 늘거나 줄 때마다 주를 새로 만들거나 없앴습니다. 주의 중심지도 자주 바꾸었습니다.

 

군은 주와 비슷한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몇 개의 촌을 한 데 묶어서 감시하는 구역이거나, 촌마다 다른 것을 맞추고 세금을 잘 받기 위해 만든 행정단위였습니다. 군에는 당주나 나두라는 사람이 보내졌습니다. 신라의 지방관은 땅을 다스리는 것보다 군대를 다루는 것이 더 능숙했습니다.

 

고구려의 군현제

고구려는 땅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대성은 가장 큰 도시이고, 성은 작은 도시이고, 소성은 더 작은 도시였습니다. 고구려는 이 세 가지 도시에 자기 사람들을 보내어 다스렸습니다.

 

도시마다 지방관이 있었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 지방관은 고구려가 가장 강했을 때의 지방관과 비슷했습니다. 고구려는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있었고, 자주 싸웠기 때문에 땅을 잘 통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중심으로 땅을 다스렸습니다.

 

백제의 군현제

백제는 부여라는 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 땅을 다스리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6~7세기에 백제는 땅을 5방 · 37군 · 200성으로 나누었고, 방 · 군에는 방령 · 군장이라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방령은 여러 군을 책임지었고, 군장은 민사, 군사, 행정 등의 일을 나누어서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때 백제는 군 · 성을 중심으로 군현제라는 방법으로 땅을 다스렸습니다.

 

군은 부여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 있던 담로라는 곳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37개 군은 방과 여러 소성을 잇는 중요한 행정단위였습니다. 성은 땅을 다스리는 가장 작은 단위였고, 성은 민사보다 군사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는 산성을 만들고 자주 전쟁을 했던 삼국시대의 특징 때문입니다.

 

통일신라의 군현제

신라가 삼국을 다 지배하고 나서는 땅을 다스리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자연촌이라는 작은 마을을 기준으로 9주 · 5소경이라는 큰 단위를 만들었고, 주 아래에는 군 · 현과 향 · 부곡이라는 작은 단위를 만들었습니다.

 

9주는 경덕왕 때 만들었습니다. 옛 고구려 땅에 한산주, 수약주, 하서주, 옛 백제 땅에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 신라 땅에 사벌주, 삽량주, 청주를 각각 만들었습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 3주씩 만들었습니다.

 

신라의 소경은 514년에 아시촌소경을 처음 만들었지만, 그 때는 전국에 다 만들지 않았습니다. 삼국을 다 지배하고 나서도 한 번에 5소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678년에 북원소경(지금의 원주), 680년에 금관소경(지금의 김해), 685년에 서원소경(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지금의 남원)을 만들었고, 557년에 만들었던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으로 바꾸면서 5소경을 다 만들었습니다.

 

5소경은 수도가 남쪽에 있어서 다른 곳을 잘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가야,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만들어서 거점으로 삼았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신라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한 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소경에는 사신이라는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통일신라는 땅을 주 · 군 · 현으로 나누었고, 주 · 군은 대부분 영현이라는 작은 단위를 가졌습니다. 주 · 군은 평균 2개 정도의 영현을 가졌고, 주 · 군 · 현에는 도독 · 태수 · 현령이나 소수 등이 중앙에서 보내졌습니다.

 

주의 장관은 예전에 군주라고 부르던 사람을 661년에 총관으로 바꾸었다가 785년에 도독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신라의 지방관은 땅을 다스리는 일을 많이 했지만, 총관은 주의 장관보다 당 · 정 등의 군대 칭호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또한 선덕왕 때에는 북쪽을 개척하고 방어하기 위해 패강진이라는 특별한 군사행정 지역(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9주 5소경제는 전국을 하나로 묶어서 민을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가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경덕왕 때에 군현을 바꾸고, 애장왕 때에 12도로 사신을 보내 군 · 읍의 경계를 정하는 등 군현 지배체제가 확실하게 만들어졌고, 민을 다스리는 방식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고려의 군현제

고려에 와서는 역사 상황에 따라 군현제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고려가 세워질 때, 고려에 도와준 사람들의 고향을 주나 부라고 부르고, 고려에 반대하거나 도와주지 않은 곳은 읍이나 호라고 부르면서 낮췄습니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호족이라고 하는 큰 가문이 많은 곳이 주나 부가 되었고, 고려 정부가 전국에 다 관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주나 부를 중심으로 고려 정부가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고려 정부가 잘 되어가던 983년에 최승로라는 사람이 12개의 주목을 만들었습니다. 12개의 주목은 고려가 세워질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거나, 전쟁에서 잘 싸워서 주나 부가 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고려 정부가 보낸 사람이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995년에 고려 정부가 당나라라는 나라를 본뜨고,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패서도는 주나 현과 진이라는 곳으로 나누었고, 다른 9개의 도는 주나 현으로 나누었습니다. 당시의 도는 지방을 관리하는 가장 큰 단위가 아니고, 감시하는 구역이었습니다.

 

거란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한 후에 12개의 주목을 12개의 군으로 바꾸었고,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의 이름도 절도사로 바꾸었습니다. 절도사, 유수, 도호부사, 도단련사, 단련사, 방어사, 자사 등이라는 다른 이름의 사람들도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보냈습니다.

 

1018년에 4개의 도호, 8개의 목, 56개의 지주군사, 20개의 현령, 28개의 진장을 만들었습니다. 현종이라는 왕 때에 고려 정부가 보낸 사람이 다스리는 군현은 읍이나 호의 등급과 관격이라는 것을 구분하였고, 고려 정부가 보낸 사람이 다스리는 주현은 고려 정부가 보낸 사람이 다스리지 않는 속현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군현제는 1018년에 거의 다 만들어졌습니다.

 

고려 정부가 더 강해지면서 중앙에서 보낸 사람이 지방을 직접 다스렸고, 중앙과 지방의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되었습니다. 예종이라는 왕 때에는 전국을 5개의 도로 정리하고, 도에 안찰사라는 사람을 보내서 각 도의 주나 현을 둘러보았습니다.

고려 군현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현과 주현에 속한 속군이나 속현이 있습니다. 속현의 모든 일은 주현을 통해서 고려 정부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속현에 감무라는 사람을 두어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군현의 수는 통일신라나 조선보다 많았고, 여러 가지 지방행정 단위도 있었습니다.

 

둘째, 군현 밑에 향이나 소나 부곡이나 처나 장이라는 특별한 행정구역이 많았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따르면, 향이나 부곡은 크기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군이나 현이 낮아져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 현이나 향이나 부곡의 기준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고, 향이나 부곡은 군이나 현이 바뀌면서 다른 군이나 현으로 옮겨가기도 하였습니다. 14세기 후반에는 토지와 사람이 적은 속현이나 부곡을 주현에 합치는 일을 하여, 374개의 속현은 143개로 줄였고, 부곡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조선의 군현제

조선의 군현제는 고려시대의 방식을 계속 따랐다가 3대 왕 태종 때부터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고려시대에는 5개의 큰 지역과 2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조선에서는 8개의 큰 지역으로 통일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잘 연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8개의 큰 지역을 도라고 부르고, 각 도의 이름은 그 지역의 중심 도시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라는 도시의 이름을 합친 것이고,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라는 도시의 이름을 합친 것이었습니다. 각 도의 장관은 도관찰사나 안렴사라고 불렀는데, 세조 때부터는 관찰사라고 통일했습니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고려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은 지방 행정 구역은 없애고, 큰 지방 행정 구역은 새로운 이름과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마을들을 면이라는 단위로 재편했습니다.

 

태종과 세종 때에 만든 이러한 제도를 『경국대전』이라는 책에 기록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지방 행정은 중앙 직할지 5부와 8도, 그 아래 4부, 4대도호부, 20목, 44도호부, 82군, 175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지방 행정 구역은 각각 다른 크기와 등급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지방 행정 장관들의 벼슬도 다르게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지방 행정 구역은 각각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협력하여 지방을 통치했습니다.

 

조선 왕조는 지방 행정 장관들의 권한을 더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맡았던 감무라는 직책을 양반들이 맡게 했습니다. 이 직책을 현감이라고 부르고, 현감은 지방 행정 구역 중 하나인 현을 관리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지방 행정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향리라는 직책을 약화시켰습니다. 향리는 지방 행정 구역 중 하나인 향을 관리했는데, 조선에서는 향리를 지방 관청의 일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방 행정 장관들이 향촌의 토지주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직접 지방을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조선 정부의 목표였습니다.

 

조선 왕조는 편의를 위해서 자연적으로 생긴 마을들을 일정한 수의 가구로 나누고, 그것을 면이나 방, 사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리나 동 등으로 나누었습니다. 1485년(성종 16) 조선 왕조는 '5가구를 1통으로 하고, 통의 주인을 통주라고 하고, 5통(25가구)을 1리로 하고, 리의 주인을 이정이라고 하고, 각 면에 권농관이라는 관리자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방 행정 장관들이 지방 사회를 통제하면서 민들을 가르치고, 농사를 잘 지도하고, 세금을 잘 걷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농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생긴 마을들이 커졌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전기에는 방위면이라고 불렀던 큰 면은 없어지고, 방위면 밑에 있던 리가 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자연적으로 생긴 마을들이 하나 또는 몇 개의 리로 나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군현제와 면리제라는 지방 행정 제도가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근대의 군현제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면서 지방 행정 제도도 변화되었습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을 하면서 8도제를 없애고, 23부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래의 부, 목, 군, 현이 모두 337개의 군으로 통일되었습니다. 각 부에는 왕이 임명한 관찰사 1명, 중앙 정부가 임명한 참서관 1명, 판사 1명 등이 있었고, 각 군에는 중앙 정부가 임명한 군수 1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3부제는 행정이 복잡하고 어렵고,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칙령 제35호를 내려 23부제를 없앴고, 바로 다음에 내린 칙령 제36호 제1조에 따라 현대 대한민국의 지방 행정 구역과 비슷한 13도제를 실시했습니다. 13도 밑에는 8부, 1목, 332군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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