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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천도 뜻, 고려시대 강화천도 과정과 결과 알아보기

by 알아봐요 2024. 1. 7.

강화천도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232년에 최우가 주도하여 단행되었으며, 강화도는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피난임시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강화천도는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용기있는 결단이었지만, 동시에 몽골과의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백성들의 고통을 증대시킨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강화천도의 정의, 개설, 역사적 배경, 경과, 결과, 의의와 평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강화천도란?

강화천도란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일은 1232년에 최우라는 사람이 주도했습니다. 그 때부터 1270년까지 강화도는 고려의 임시 수도였습니다.

 

강화천도를 한 이유 강화천도를 한 이유는 몽골과 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225년에 몽골의 사신이 고려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몽골은 1231년에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고려는 몽골과 화해하기 위해 몽골군의 진영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세금과 왕족이나 관리의 아이들을 몽골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고려는 이런 요구에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몽골과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몽골군은 배로 싸우는 것이 서툴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강화도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또한 수도였던 개경과 가까웠고, 다른 지방과도 잘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강화천도의 과정

강화천도에 대해 처음 이야기한 것은 1232년 2월이었습니다. 그때 관리들이 모여서 이 일을 논의했지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5월에 다시 논의했는데도, 몇몇 사람들만이 강화천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6월에 몽골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몽골군이 곧 다시 침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강화천도론이 더 강해졌습니다. 최우는 강화천도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사람들은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승단이라는 사람은 강화천도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세충이라는 사람도 강화천도를 반대했는데, 최우에게 죽여졌습니다. 이렇게 최우가 강화천도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보고해서, 7월 6일에 왕이 개경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것에 대해 최우의 친구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왕이 강화도로 가는 날, 이통이라는 사람이 초적이나 노예, 승려들과 함께 개경을 지키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최우는 강화도로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우는 강화도로 가자마자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강화천도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이나 관청은 백성들의 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년 후에는 궁궐과 관청이 완성되었습니다. 1251년에는 국자감이, 1255년에는 태묘가 만들어졌습니다. 강화도의 규모는 개경보다 작았지만, 수도로서의 시설이 점점 갖춰졌습니다.

 

강화도의 방어시설로는 성벽과 제방이 있었습니다. 강화읍에 있는 성벽은 강화천도할 때 쌓은 것이고, 동남쪽을 둘러싼 성벽은 천도 한 해 후에 증축한 것입니다. 강화읍에 있는 중앙의 성벽은 1250년에 쌓은 것이고, 문이 17개가 있었습니다. 바다에 있는 제방은 1235년에 만든 것이고, 다른 지방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겨서 성벽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최우의 일가는 백성들이 몽골과 싸우느라 힘들어했는데도, 강화도에서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최우는 자기 집을 짓을 때 군대나 공무원을 써서 개경에서 나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써서 서산에 얼음 창고를 만들어 여름에 물고기를 저장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들도 강화도에서 저택이나 사원을 지었고, 잔치나 축제를 했습니다.

 

강화천도의 결과

고려는 강화도에서 70년 동안 몽골과 싸웠습니다. 최우의 일가가 쓰러지고, 1270년에 관리들이 개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몽골과 싸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잡혀갔습니다. 많은 재산이나 가축도 빼앗겼습니다. 또한 고려의 문화재도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속활자나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같은 좋은 것들도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몽골과 화해한 원종이 개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최우가 만든 삼별초군이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몽골과 계속 싸웠습니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이라고 합니다.

 

강화천도의 평가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몽골과 싸우기 위해 용감하게 수도를 옮긴 것이고, 고려의 자주성을 지킨 것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수도를 옮긴 것이고, 다른 지방의 백성들을 무시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최우의 일가는 강화도에서 방어에만 신경쓰고, 다른 지방이 몽골에게 공격받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화도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억압했습니다. 강화도의 백성들은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힘들게 일했지만, 최우의 일가나 왕족, 귀족들은 강화도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강화천도는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용기있는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화천도는 몽골의 침략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더 심한 피해와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무시한 최우의 일가나 지방의 귀족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비난할 만합니다. 강화천도 대신에 몽골과의 외교나 항전을 더 잘 준비했더라면, 고려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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