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발해의 탄생
발해는 926년에 고려에 멸망했다. 그러나 발해의 후예들은 거란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편입되어도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거란의 군사와 관리로서 활약하면서 발해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 꿈은 1116년에 고영창이라는 인물에 의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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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창은 거란 황제 천조제의 신임을 받아 발해무용마군이라는 군대를 이끌고 여진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란의 독재와 탐욕에 실망하고 있었다. 거란의 동경유수 소보선은 발해 유민들에게 무자비한 압박과 착취를 가했고,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고영창은 이에 분노하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소보선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동경 용양부를 점령하고, 자신을 대발해의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발해의 전통을 계승하고, 융기라는 원년을 삼았다. 그는 대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대발해의 몰락
대발해는 거란의 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당시 거란은 여진의 강력한 공격에 맞서고 있었다. 여진의 완안아골타는 1114년에 거란을 크게 무찌르고, 1115년에 금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거란은 내외로 혼란스러웠고, 반란과 난민이 끊이지 않았다. 대발해는 이런 상황에서 잠시 기세를 탔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거란 동경도의 79주 중 50여 주를 장악했다. 거란의 장수들도 대발해에 굴복했다.
그러나 대발해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영창은 금과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금은 대발해에게 요동의 양도와 황제칭호의 포기를 요구했다. 고영창은 이에 거절하고, 금에게 발해인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런 고집스러운 태도는 금의 분노를 사고, 금은 대발해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금의 장수 알로는 대발해의 수도를 공격하고, 고영창을 죽였다. 대발해는 나라를 세운 지 5개월 만에 멸망했다.
대발해의 부흥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대발해의 유민들은 금의 지배를 받거나, 고려로 피신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대발해의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국가체제의 미흡, 금과의 외교실패, 다른 지역의 발해유민과의 연합실패, 발해계의 공동체 의식의 약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발해는 발해의 후예들이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발해의 계승을 꿈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거란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편입되어도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갔다. 대발해는 짧은 꿈이었지만, 그 꿈은 발해의 영광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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