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란?
대마도는 원래 신라의 영토였지만, 점차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살게 되어 일본의 땅이 되었다. 대마도의 주인은 소씨라는 가문이었는데, 일본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려 고종 시대에 일본의 군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자가 자신의 친척인 소를 대마도에 보내어 점령하고, 그를 대마도의 관리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대마도는 사람이 적고, 땅이 메마라 농사를 짓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내란으로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밥을 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무사와 농민 등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져 비상한 방법으로 물자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대마도를 포함한 삼도라는 섬들이 왜구의 거점이 되어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벌였다. 대마도 정벌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해군과 무기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의 역사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난동을 부리던 일본인의 해적 무리를 말한다. 특히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가 날뛰어 피해가 심했다. 이에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사절을 보내거나 성을 쌓거나 해군을 늘리거나 무기를 개발하는 등의 대책을 세웠지만,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구의 흉포함을 잘 알고 있었던, 당시 고려 말의 장군이었던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자마자 왜구를 막는 데 힘썼고 동시에 상인이나 귀화한 왜인들에게는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도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은 1389년 창왕 1년 2월 박위가 이끈 것이다. 우왕이 14년 동안 왕이 되었을 때 왜구가 378번이나 침입했는데, 그들의 근원지가 대마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나 장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배가 100척 이상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1만 명 정도의 군사가 투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구의 배 300여 척과 언덕에 있는 관청과 집들을 다 불태웠다. 그리고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펼쳐, 고려인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하고 돌아왔다. 이들의 성과는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에 창왕도 그의 공을 칭찬하고 큰 상을 주었고, 그 후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었고, 유구국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1396년 태조 5년과 1419년 세종 1년에 있었다. 태조는 왜인들이 조선에 온 것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을 소탕하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그런데도 왜인들은 조선에 자주 유입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1393년부터 1397년까지 53번이나 계속되었다. 정벌의 계기는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가 120척의 배로 동래, 기장, 동평성을 점령하고, 병선 16척을 빼앗고, 해군 장수를 죽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 18일 통영에, 23일에는 영해성에 침략했고 11월에도 5번이나 침입하는 등 이 해에만 13번이나 침입했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대응이 필요했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5도의 군대를 통솔하는 장관으로 임명하고,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와 대마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주원방포에서 출발해 거제도로 돌아올 때까지 14일이 걸렸다. 김사형이 돌아올 때 태조가 직접 흥인문 밖까지 나가 고생을 격려했고, 서대라는 훈장을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정벌을 알 수 있다. 이 정벌은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선의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선에 와서 인사를 드린 이후로는 거의 매년 조선에 와서 선물을 주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갔다. 이들 사절은 대마도의 주인인 소와 그의 아들 및 섬의 각 지방의 장수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상인들도 많이 늘어나 항구에서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왜인이 많이 살았고, 그들 중에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조선의 약점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1418년부터는 울산과 통영에 왜인을 모아두고, 그들이 허가된 배만 조선에 들어오게 했다.
1419년 대마도는 기근에 시달렸다. 왜구들은 명나라로 가서 약탈을 하려고 했는데, 그 길에 조선의 연안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 때 비인현 도두음곶을 침탈하면서 병선 7척과 군사 수백 명을 잃었다. 또한 해주와 황해도도 약탈했고, 이사검 등이 토벌하러 갔다가 왜구의 포위를 받았다.이러한 왜구의 난동에 조선은 분노했다. 태종은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의했다. 그는 이종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3도의 병선과 군사를 동원했다. 또한 유정현을 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감독하게 했다. 그리고 조선에 거주하던 왜인들을 처벌하고, 분산시켰다.
준비를 마친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에서 출발하여 20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이종무는 도주 소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벌군은 섬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왜구들을 쫓아내고 가옥과 선박을 불태웠다.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중국인과 본국인을 구출했다. 이종무는 적이 다시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책을 세웠다. 하지만 정벌군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이로군에서는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과 장수, 군사 수백 명이 전사했다. 대마도주 소는 정벌군이 오래 머물 것을 두려워하여 퇴사를 요청했고, 정벌군은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다.
대마도 정벌은 조선의 위엄을 세운 역사적 승리였다. 왜구들은 정벌군의 힘을 알고 더 이상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화적인 내왕자로 변했다. 또한 그들의 죄는 용서하고, 약탈을 방지하기 위한 정벌의 목적은 달성했다. 정벌 후에도 왜구들은 몇 번 더 침입했지만, 조선은 그들을 막았다. 대마도주 소는 항복하려다가 번복했고,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은 왜구들을 평화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1419년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동정 후에는 대마도뿐만 아니라 서부 일본의 도둑들도 평화적인 내왕자로 변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년 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다. 또한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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