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장이란 고려시대에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을 말합니다. 거란장은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 글에서는 거란장의 정의, 내용, 성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거란장 뜻
거란장은 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입니다. 거란은 고대 동아시아의 한 민족으로, 발해의 멸망 후 거란이라는 국가를 세웠습니다. 거란은 고려와 요나라와 삼국동맹을 맺었으나, 1125년에 요나라에 멸망당했습니다. 그 후 거란 유민들은 금나라와 몽고의 침략을 받으며 고려로 난민처럼 흘러들어왔습니다. 고려는 이들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보내 사람이 살지 않고 놀고 있는 넓은 땅을 가려 모여 살게 하고, 그곳에 경작할 땅도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해 고려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고려 토착인이 살던 곳과 구별해 '거란장'이라 불렀습니다.
거란장 역사
거란장은 고려시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가장 처음으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993년(성종 12) 거란의 침입을 시작으로 거란과 자주 충돌하였던 시기입니다. 이 때부터 고려에는 거란군 포로나 투항해 온 자들이 많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거나, 고려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국민으로서 존중받았으며, 고려의 왕실과도 친분을 맺었습니다. 예를 들어, 거란인 출신의 김부식은 고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저자이며, 거란인 출신의 김윤식은 고려의 문신이자 왕의 시조였습니다.
두 번째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1125년(인종 3) 요나라가 멸망하자, 유민들이 금나라에 대항해 광복운동을 펼쳤으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던 시기입니다. 그러다가 몽고의 부흥과 함께 유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아 고려로 남하했다가 몽고군과 고려군의 협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적으로서 처치되거나, 포로로 잡혀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백성으로 삼기는 했지만, 거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고려에 반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거란 유민의 지도자였던 양수척은 고려의 집권자 최충헌과 다투며 거란의 광복을 위해 몽고와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로 거란장이 생긴 것은 1219년(고종 6) 거란 유민들의 최후의 항전이 사라졌던 시기입니다. 그 때 몽고장수 합진은 거란의 부녀·사내아이 700명과 적에게 노략되었던 고려인 200명을 고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5세 가량의 거란 여인 9명과 준마 9필을 고려의 장군 조충과 김취려에게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몽고로 데려가 서루지방에 살게 하였습니다. 고려의 조충 또한 이러한 거란의 포로들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보내 사람이 살지 않고 놀고 있는 넓은 땅을 가려 모여 살게 하고, 그곳에 경작할 땅도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해 고려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백성으로서의 대우는 천인에 가까웠습니다.
거란 멸망 전후의 거란장
거란장은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란장의 성격은 거란인들의 출신과 성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초기 거란인들은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거란인화 된 ‘발해계 거란인’들로서 친고려적 성향을 띠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군사와 문화에 기여하였으며, 고려의 왕실과도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반면 거란 멸망 후 거란장에 살게 되었던 거란유민들은 전쟁포로로서 반고려적 거란인들로 고려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거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고려에 반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백성으로서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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