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역사 속으로 떠나보려 합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공녀란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배경과 사연이 있는지, 그리고 공녀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녀 뜻
공녀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원나라와 명나라의 요구로 국내에서 선발되어 원·명나라에 보내진 부녀와 처녀를 말합니다. 공녀라는 말은 공(貢)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공녀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황실이나 귀족들의 궁인이나 시녀가 되었으며, 때로는 노비나 기생으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공녀의 기원
공녀의 기원은 고려가 몽골에 복속된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몽골은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는데, 그 중에 공녀와 환관(宦官)의 차출도 포함되었습니다. 몽골은 처음에는 남송의 군인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부녀를 보내도록 요구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과부나 역적의 처, 승려의 딸 등을 공녀로 선발하여 보냈습니다. 이후에는 동녀(童女)라는 이름으로 처녀들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공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려시대의 공녀는 원나라로 보내졌고 대부분 고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며 고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공녀의 대상이 되는 신분은 처음에는 과부나 역적의 딸이었으나 점차 왕족이나 귀족, 관료의 딸들도 선발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녀의 나이도 점차 어려졌습니다. 고려시대의 공녀는 대체적으로 13~16세의 여인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이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녀 선발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민간에서는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이나 사위를 미리 들이는 예서제(豫壻制)의 풍습도 생겼습니다. 그것마저 못한 여인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도 했고,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다만 고려의 공녀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올라 호사를 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몽골 사회의 상층부에서 황제나 황후, 귀족들의 궁인이나 시녀가 되어 큰 활약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 지위까지 오른 기자오(奇子敖)의 딸 기황후(奇皇后)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고려의 의복 제도와 음식이 원나라 황실과 고관 내에 퍼져 원에서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되었고 고려만두, 고려떡, 고려아청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공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선시대의 공녀는 고려시대의 공녀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습니다. 조선은 원의 멸망 후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 중 첫 번째 공녀는 공민왕이 명나라 황실의 궁녀로 보낸 주영찬의 딸이었고, 주영찬의 딸은 이후 영락제(永樂帝)의 정식 후궁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녀인 한씨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동생 한확(韓確)이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공녀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황족의 후궁이 된 사례도 있긴 했으나 대개는 음식을 만들거나 춤추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의 공녀 요구는 원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원은 고려에 대대적이고 공개적으로 공녀를 요구했다면, 명은 비밀리에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공녀의 친족들이 공녀를 만나러 갈 때 진공사(進貢使) 등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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