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려시대 왕릉 중에서 경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개의 능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경릉은 고려시대에 왕이나 왕비의 능호(陵號)로 사용되었던 한자어입니다. 능호란 능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묘호(廟號)와 함께 부여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제28대 충혜왕의 비 덕녕공주의 능호는 경릉(頃陵)이고, 묘호는 덕녕(德寧)입니다. 능호는 능의 위치나 모양, 왕의 풍모나 행실 등을 고려하여 정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왕릉 중 '경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능이 세 곳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경릉의 공통점
그럼 이제 세 곳의 경릉(頃陵, 慶陵, 景陵)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개의 경릉은 모두 북한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후기의 충혜왕의 비 덕녕공주와 충렬왕, 고려 전기의 문종의 능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왕릉이다.
- 모두 경릉이라는 능호를 가지고 있다.
- 모두 조선시대 이후에 관리가 부실하여 현재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세 경릉의 차이점
이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표기법은 같지만 한자로 보면 '경'자가 완전히 다르게 쓰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릉(頃陵)
충혜왕의 비 덕녕공주의 능으로, 몽골인으로 태어나 고려의 왕비가 된 인물입니다. 고려에서는 왕후나 태후에게 휘호와 함께 능호를 붙였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도 불구하고 덕녕공주의 무덤에 경릉이라는 능호를 붙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덕녕공주는 충혜왕과 함께 고려의 국정을 잠시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덕녕공주의 신주는 태묘의 충혜왕 신실주에 부묘되었습니다.
경릉(慶陵)
충렬왕의 능으로, 원나라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고려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충렬왕은 세자인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가 몇 달 후 다시 왕위에 복귀하는 등 정치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충렬왕의 장례를 치를 때, 충선왕이 직접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손수 향로를 들고 걸어서 산릉에 이르렀다는 효행이 전해집니다. 충렬왕의 신주는 태묘에 부묘되었습니다.
경릉(景陵)
경릉(景陵)은 고려 전기의 제11대 왕, 문종의 능입니다. 문종은 고려의 국력을 회복하고 외세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문종은 1083년에 승하하였고, 그해 8월에 경릉에 안장되었습니다. 문종의 신주는 1215년에 이곳에 묻혔습니다. '경국대전'에 소재지 수령으로 하여금 매년 능을 보살피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으로 세 개의 경릉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지만, 현재는 북한에 있어서 접근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들의 역사적 의미와 특징을 알고 있다면, 고려시대의 왕릉에 대해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다른 왕릉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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