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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5세기부터 1125년까지 동아시아권 강대국 중 하나

by 알아봐요 2023. 12. 13.

거란, 5세기부터 1125년까지 동아시아권 강대국 중 하나

 

 

거란이란 5세기 중엽부터 1125년까지 퉁구스와 몽골의 혼혈족으로 알려진 동호(東胡)계의 한 종족명이자 국가명이었습니다. 거란은 중국과 고려, 발해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유목민과 농경민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역사와 문화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번에는 거란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멸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거란의 형성

거란의 본래 이름은 키탄(Qitan, Khitan), 또는 키타이(Qitay)와 가까운 발음으로 짐작됩니다. 한문으로 된 기록을 보면 요(遼), 대요(大遼), 대거란(大契丹) 등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이들은 한자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한자식 명칭이며, 거란은 줄곧 ‘키탄’이라는 자신들의 명칭을 고수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거란의 영역을 보면 동쪽으로는 랴오허(遼河)강,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으로는 케룰렌강, 남쪽으로는 현 베이징 남쪽의 백구하(白溝河)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었습니다. 북면관은 유목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거란족 고유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면관은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한족을 다스릴 때 편의를 위하여 두었습니다. 법제 또한 거란의 고유한 부족법과 한족의 법을 같이 썼으며, 문자도 돌궐문자를 모방한 거란문자를 만들어 한자와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거란이란 이름은 554년에 편찬된 위서(魏書)에 나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소수림왕 8년인 378년에 거란이 북변을 침략하였고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거란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란족은 8부족이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말과 오대(五代)의 혼란이 지속된 9세기 후반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통합되었습니다. 거란을 통일한 야율아보기는 907년에 ‘텡그리카간(天可汗)'에 즉위하였습니다. 916년에는 중국식의 황제를 자칭하였습니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거란의 발전

야율아보기를 이은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은 석경당(石敬瑭)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넘겨받았습니다. 이는 유목 국가가 농경지역을 지배하게 된 첫 번째 사례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금(金), 원(元), 청(淸)으로 이어졌습니다.

 

거란은 중국과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와 친선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고려의 왕족과 결혼을 통해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에게 연운십육주를 돌려주기도 했으며, 고려의 문화와 제도를 존중하고 배웠습니다. 거란은 고려와 함께 송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송나라의 수도인 비연(汴連)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의 저항과 고려의 배신에 부딪혀 결국 비연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의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민족의 문화와 제도를 수용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거란은 한족의 문화와 제도를 배우고 적용했으며, 한족의 학자와 예술가를 존중하고 초빙했습니다. 거란은 불교와 도교, 천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고 보호했으며, 종교적인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기 위해 거란문자와 한자를 사용했으며, 『거란사(契丹史)』, 『거란국기(契丹國記)』, 『거란시(契丹詩)』 등의 저작을 남겼습니다.

 

거란의 멸망

거란은 11세기 후반부터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거란은 북면관과 남면관의 갈등과 왕실의 분쟁으로 내란이 잦아졌으며, 송나라와 금(金)의 연합에 의해 군사적으로 위협받았습니다. 거란은 1125년에 금의 침공을 받아 대패하고, 황제 야율차오(耶律朔)가 사로잡혔습니다.

 

거란의 잔존과 거란의 후예

거란은 1125년에 금에게 패배하고 멸망했지만, 일부 거란인들은 저항을 계속하거나 탈출했습니다. 거란의 잔존세력은 1132년에 서부에 새로운 거란국가인 서요(西遼)를 세웠습니다. 서요는 금과 송의 전쟁에 개입하거나 몽골과 연합하면서 존속했으나, 1218년에 몽골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거란의 후예들은 몽골이나 중국에 흡수되거나 독립적인 민족으로 살아갔습니다. 몽골의 칭기스칸은 거란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며, 몽골 제국의 일부 거란인들은 몽골의 통치계층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원나라와 청나라는 거란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하거나 차용했으며, 거란문자를 사용했습니다.

 

거란의 의미와 가치

거란은 동아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국가입니다. 거란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민족의 문화와 제도를 수용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거란은 중국과 고려, 발해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유목 국가가 농경지역을 지배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거란문자와 거란사 등의 저작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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