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

견금, 고려 전기의 영군장군

by 알아봐요 2024. 2. 17.

오늘은 고려 전기에 활약한 호족 견금(犬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견금은 본주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었으며, 왕건의 건국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 견금의 생애와 활동사항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견금의 출신과 직위

견금은 청주 출신의 호족으로, 본주의 영군장군이 되었습니다. 영군장군은 고려 전기에 군사적인 권한을 가진 고위 관직이었습니다. 견금은 왕건의 건국에 참여하기 전에는 청주의 군사세력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의 건국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견금은 왕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청주의 반란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왕건과의 만남

견금은 918년(태조 1)에 부장(副將) 연익(連翼), 흥현(興鉉)과 함께 개경에 가서 왕건에게 충성하는 청주인 김근겸(金勤謙), 관준(寬駿), 김언규(金言規) 등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김근겸 등이 왕건의 건국운동에 방해가 되고, 청주의 군사세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견금 등의 요청을 거절하고, 도리어 김근겸 등에 의해 이심(異心)이 있는 자라는 반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견금 등을 후대하면서 돌아가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왕건의 처사에 감복하여 결국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제어하기가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관군의 파견을 청하였으며, 왕건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청주의 변란과 진압

왕건은 건의에 따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군사 1,500명으로 진주(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 주둔하게 하여 변란에 대비하게 했습니다. 또 마군장군 능식(能植)을 보내어 도안군(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을 진무하자 청주세력이 쉽게 반역하지 못했으며, 뒤에 진선(陳瑄)과 그 아우 선장(宣長)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쉽게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견금의 후일과 평가

견금은 왕건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그의 후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고려시대에 많은 관직을 거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의 손자인 견희(犬喜)는 고려 태종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견유(犬祐)는 고려 성종 때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습니다.

 

견금, 고려 전기의 영군장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