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흥은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활약한 군사와 정치가로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맞서고, 신돈의 폐단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복흥의 출생과 초기 경력
경복흥은 본관이 청주이고, 초명은 경천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우대언 경사만이고, 아들로는 경보, 경진, 경의가 있었습니다. 경복흥은 벼슬길에 들어가서 여러 직책을 거쳐, 1354년에 군부판서가 되었습니다. 1356년에는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가 되었고, 이듬해 지문하정사, 지정사상의에 올랐습니다. 이때 고려의 도성인 개성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도성수축을 논의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복흥은 정세운, 유숙 등과 함께 도성수축이 백성의 피폐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도성수축보다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경복흥의 군사적 공로와 정치적 성과
경복흥은 1358년에 참지문하정사가 되었고, 서경군민만호부만호, 서북면도순문사를 겸하면서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였습니다. 1359년에는 부원파 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1등공신에 봉해졌습니다. 이해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원수, 부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적의 위세가 강하여 진격하지 못하였고, 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홍언박의 두둔으로 무사히 벗어났습니다.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의 호를 받았고, 평장사, 수문하시중에 올랐습니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하여 복주로 난을 피했습니다. 1363년에는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최유가 원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습니다. 이듬해 최유가 의주, 선주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최영, 이성계 등이 달천에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경복흥이 이러한 첩보를 왕에게 알리자, 왕은 크게 기뻐해 좌시중에 임명했습니다.
경복흥의 귀양과 복귀
경복흥은 1365년에 수시중이 되었으나, 신돈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367년 오인택, 안우경, 김원명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로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다시 소환되어 좌시중에 임명되었고, 정방의 제조를 겸하며 전선을 맡았습니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의 주장으로 우왕이 즉위하였습니다. 이듬해 이인임과 함께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을 귀양 보냈습니다. 또, 왕이 서연을 게을리 하려는 것과 전주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1377년 수성도통사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하였습니다.
경복흥의 죽음과 평가
경복흥은 이인임, 지윤 등이 권력을 휘두르자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도당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380년 이인임, 임견미가 경복흥이 정무를 보지 않는다고 참소하여 청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경복흥은 고려 후기의 어려운 시기에 국난을 극복하고, 왕을 충성스럽게 보필한 인물로서, 공민왕과 우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맞서고, 정치적으로는 신돈의 폐단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인물로서, 고려의 국력을 회복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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