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고려 후기의 국왕으로, 원나라의 간섭과 왜구, 홍건적의 침입 등 어려운 시기에 여러 차례의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공민왕의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공민왕의 가계 및 인적 사항
공민왕의 이름은 왕전이고, 옛 이름은 왕기였습니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로, 1330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충숙왕이고 어머니는 명덕태후 홍씨이며, 충혜왕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왕비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위왕의 딸이고, 이름은 부다시리였습니다. 1349년에 공민왕이 원나라에 숙위하고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로 책봉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왕비로는 이 밖에 혜비 이씨, 익비 한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등이 있습니다.
공민왕의 주요 활동
공민왕은 1341년에 왕의 동생 강릉대군이라는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습니다. 충목왕이 즉위하여 강릉부원대군으로 책봉되었고, 충목왕 사후 윤택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했으나, 고용보 등 부원세력의 지원을 받은 충정왕이 즉위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실패했습니다.
그 뒤 공민왕은 그대로 원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다가 1351년에 원나라 황실이 외척 세력의 전횡과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공민왕이 재위한 시기는 원나라 간섭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가 건국되어 원명 교체의 길목에 들어선 시기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탈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인명 손실이 커서 민생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이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여러 차례 개혁 정치를 추진하여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1356년에 공민왕은 기철, 권겸, 노책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를 회복하였습니다. 인당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3참을 공격하여 이를 고려 영토에 편입하였습니다.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한 다음, 사회 전반의 개혁을 표방하는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359년부터 1364년까지 5년 동안 벌어진 몇 차례의 외침과 반란은 공민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계속되는 왜구 침탈,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 국왕의 안동 몽진, 정세운, 이방실, 안우, 김득배 등 살해 사건, 김용의 흥왕사의 변, 원나라의 덕흥군 옹립과 최유의 침입 등 일련의 외침과 내란은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민생 문제를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이 같은 정치적 위기 국면을 신돈을 기용하여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세신대족’ ‘초야신진’ ‘유생’ 출신 등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공민왕은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이 같은 선택을 앞당겼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면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영 등 무장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 강화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 신돈이 주도하는 개혁 정치를 지원하였습니다.
신돈 집권기의 개혁은 토지 문제의 해결과 교육 개혁, 관료 체제의 정비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토지 문제의 해결은 권력층이 탈점한 토지의 환수와 천민에 대한 속량 조치를 표방한 전민변정사업으로 나타났으며, 교육 개혁은 국학 중흥 사업으로 가시화되었습니다. 아울러 산관에 대한 통제와 순자격제의 실시를 통해 관료 체제의 정비와 정치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내재추제를 시행하여 권력 구조를 개편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공민왕의 죽음
신돈을 기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해 온 공민왕은 1369년 초부터 국내 정치 세력의 반발과 지나친 노동력 징발에 따른 민생 문제의 악화, 새로 흥기한 명의 압력으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1370년 10월 친정을 선언한 다음, 이듬해 7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가 그곳에서 처형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신돈 숙청 5개월 뒤 다시 개혁 교서를 반포하였습니다. 심각한 민생 문제를 완화하는 한편 신돈 정권의 붕괴에 따라 가시화될 수 있는 왕권의 위기를 개혁 정국의 조성을 통해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체제를 정비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하고, 주로 문벌 출신 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를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명의 압력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같은 정치 목표는 1374년 9월 환관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 소속 관리들이 왕을 시해함으로써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공민왕은 자제위의 반란에 의해 시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장충단에 임시로 매장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 우왕이 즉위하였으나, 공민왕의 유해를 옮기지 못하고 1388년에 폐위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유해는 1392년에 이성계가 즉위한 후에야 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공민왕릉은 현 개성시 개풍구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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