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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생애와 활동 사항

by 알아봐요 2023. 12. 9.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지만, 그의 삶과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고, 왕이 되어서는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떻게 폐위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양왕의 즉위

공양왕의 이름은 왕요였습니다. 그는 고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 왕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이고, 비는 창성군 노진의 딸 순비 노씨였습니다. 공양왕은 1389년에 이성계와 심덕부 등에 의해 폐위된 창왕의 대신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위 후에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받아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습니다. 이는 고려 왕실의 명맥을 끊고, 이성계의 세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양왕의 개혁

공양왕은 재위 3년 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계 등 신진사대부들의 자기 세력 부식을 위한 사회 개혁일 뿐이었습니다. 공양왕은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 판도사, 예의사, 군부사, 전법사, 전공사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습니다. 유학의 진흥을 위해서는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 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습니다. 또한 배불숭유론에 의한 주자가례를 시행해 집집마다 가묘를 세워 음사를 근절하고, 출가자들을 환속시켜 군사에 보충하거나 본업에 충실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오교양종을 없애고, 불사의 재산을 몰수해 각 관사에 분속시켰습니다.

 

1390년 도선의 비록에 의해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판삼사사 안종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습니다. 1391년 광흥창, 풍저창을 서강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준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해 녹제와 전제를 개혁하였는데, 이것은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물추고도감을 두어 노비결송법과 결송법을 정하였습니다.

 

공양왕의 폐위와 죽음

이 해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세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로써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공양왕 살해에 대해서는 조선의 명령에 따라 목을 매서 죽였다는 설과, 공양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능은 고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것과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고려 왕실의 불안하였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선 태종 16년 공양왕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이상으로 공양왕에 대한 블로그 글을 마치겠습니다. 공양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서, 그의 삶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책임과 권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과 희생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생애와 활동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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